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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정보자유 활동가, 애론 스와르츠
2016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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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정보자유활동가, 비운의 천재로 알려진 애론 스와르츠는 학술 저널 온라인 도서관 ‘제이스토(Jstor)’에서 자신의 MIT 계정을 이용하여 약 480만 개의 논문을 다운받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통신 사기와 컴퓨터 사기 혐의로 최대 35년과 100만 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판결을 진행하는 동안 애론 스와르츠는 압박감과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고 결국 2013년 1월 11일 자살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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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론 스와르츠(Aaron Swartz)는 1986년 11월 일리노이 하이랜드 파크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소프트웨어 회사인 마크 윌리엄스 회사의 설립자로 그가 일찍이 컴퓨터를 접할 수 있었던 것에 많은 영향을 줬다. 특히나 그는 프로그래밍, 인터넷, 인터넷 문화에 크게 관심을 보였고 그만큼 잘하기도 했다.[2] 그는 이런 방면에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막상 학업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시카고 근처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를 9학년까지 다니다 10학년에 졸업했다.[3] 이후에도 그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스탠퍼드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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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천재라는 것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13살 때는 비영리 웹사이트를 개발하여 젊은 개발자에게 주어지는 ArsDigita 상을 수여 받았다.[4] 그가 당시 만든 웹사이트는 인터넷에 정보를 저장하고 인터넷을 하나의 백과사전처럼 사용하는 웹사이트였다. 위키피디아와 비슷하지만, 위키피디아는 애론 스와르츠가 만들고 난 5년 후에서야 나왔다. 그가 14살 때는 네트워크의 우편 배달부라고 할 수 있는 RSS 1.0버전 공동 개발에 참여하였다. RSS는 각 웹사이트에 새롭게 올라오는 정보를 한 번에 모아서 보여주는 웹상의 피딩(Feeding) 포맷이다.[5] 또한, 그는 레딧(Reddit)이라는 사이트와도 관련이 깊다.[6] 레딧은 read와 edit이 합성어로 이용자들이 뉴스 콘텐츠를 읽고 편집한다는 의미가 있다.[7] 즉, 레딧은 자신의 글을 가져와 사이트에 포스팅하여 공유하는 웹사이트로 애론 스와르츠도 레딧을 개발하는데 참여했다. 레딧은 특히나 지난 당선에서 오바마가 국민과 대화하는데 이용[8]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유명인이 레딧에 참여하고 있으며 미국인 10명 중 7명이 레딧을 사용하고 있다고 집계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웹사이트다.[9] 외에도 그는 마크다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참여하였다.[10] 마크다운은 일반 텍스트 문서에 태그를 사용하여 글자의 굵기나 크기, 이미지 삽입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문서의 양식을 편집해주는 텍스트 에디터다. 마크다운을 이용하면 웹 언어인 HTML, XHTML 등으로 다른 형태의 문서로 변환이 쉽게 가능하다.

애론 스와르츠는 프로그래밍뿐만 아니라 정보 자유화를 위한 사회적인 운동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15세에 크리에이티브(Creative Commons) 커먼즈 비영리 단체에 참여하여 저작권자 이용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저작물을 이용하자는 운동에 동참했었다.[11] 또한, 변화를 요구하는 단체 디맨드 프로그래스(Demand Progress)를 만들어 미국의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 법안인 온라인 해적 행위 방지법안(SOPA), 지적재산권법안(PIPA)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12]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인터넷,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개혁단체인 루트 스트라이커와 온라인 시민운동 네트워크인 아바즈(Avaaz)와 같은 재단에서 활동했다.[13] 이처럼 애론 스와르츠가 만든 프로그램, 그가 했던 행동 모든 일 하나하나가 우리의 생활 속에 녹아 들었다. 우리는 그가 주장했었던 지식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정보의 자유화를 우리도 알게 모르게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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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렇게 어렸을 적부터 인터넷 자유를 위해 활동적으로 핵티비즘을 실현하려 했던 것은 학술정보에 대한 접근의 변화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인류의 지적 재산인 학술 정보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직접 돈을 내고 보거나 혹은 대학생의 신분으로 보는 거였다. 사실 대학생 신분도 등록금을 내고 있으니 사실상 돈을 내고 보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런 지적 정보의 공유로 누구도 볼 수 있는 자유화였다.

애론 스와르츠는 지적 정보의 자유화가 실현되면 세상에 발전은 더욱 앞당겨질 것이라 말했다. 실제로 많은 발전에 제약을 걸고 있는 것이 지적재산권이다. 잭 안드라카(Jack Andraka)는 15세의 나이로 췌장암, 난소암, 폐암을 5분 이내에 조기 진단할 수 있는 센서를 발명한다.[14] 그는 췌장, 난소, 폐에서 암의 존재를 나타내는 단백질의 증가를 확인하여 암의 여부를 확인하였다. 그는 이러한 발명을 위해 구글과 위키백과를 찾아 연구하고 존스 홉킨스에서 200명 중 199명이 거절하고 1명의 혹독한 면접 끝에 그를 받아주어 연구실에서 연구를 완성했다. 이런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199명의 거절도 아닌 지적 정보의 제한이었다. 그가 한 논문을 보기 위해 드는 비용은 35달러 약 4만 원 돈이었다. 15세에게 35달러는 큰돈이었다. 만약 이러한 제한이 없었다면 수많은 잭 안드라카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잭 안드라카는 자신이 연구를 하면서 이러한 제약을 몸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공개하겠다던 그의 말이 무색하게 그는 자신의 연구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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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안드라카가 말한 35달러의 논문 관람 비용은 작성한 글쓴이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논문을 기재하는데도 돈이 상당하게 들고 자신이 기재한 논문을 보려고 해도 돈을 내야 한다. 유명한 과학 저널들은 이런 논문만 모아서 기재하는 것과 저작권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옛날에는 논문을 모아두고 검증하고 관람하는데 돈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터넷이 보편화되며 지적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진 이 시점에 저작권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논문의 관람 비용을 받는다는 것은 변화에 뒤떨어진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논문의 검증 또한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어불성설이다.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의 존 보허넌(John Bohanon)은 오픈액세스(open access)방식 즉, 여러 논문에서 글을 가져와 한 논문으로 만들어 전 세계 304개의 오픈액세스 학술지에 투고하였다.[15] 논문의 내용과 논리가 엉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4개의 오픈액세스 학술지 중 157개의 학술지에서 게재 허가 통보를 보냈다. 거절한 학술지는 98개에 불과했다. 이처럼 자격 미달의 학술지를 통과시켜놓고 게재 비용을 요구하는 학술지가 문제점이 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인터넷을 통한 지적정보의 자유화에 앞장서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이런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있던 그에게 가장 큰 위기가 시작된 것은 2011년이었다. 그는 MIT의 논문 보관소인 제이스토(JSTOR)에서 480만 개의 논문을 다운받았다.[16] 그는 이 사건으로 제이스토에서 불법으로 논문을 다운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제이스토는 애론 스와르츠에게 직접적인 처벌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몰래카메라를 숨겨서 애론 스와르츠가 MIT에서 하는 행동을 증거로 찍어 민사소송을 걸려고는 했다.[17] 정보 자유화를 외치는 무리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MIT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침묵이라는 입장을 내비쳤다.[18] 더군다나 기소하고 있는 와중에도 FBI와 미 정보국은 애론 스와르츠를 계속해서 감시하였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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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판에서는 그는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징역 35년과 백만 달러, 즉 113억 원에 달하는 벌금을 선고받았다.[20] 그는 이 사건에 대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지속해서 우울증에 시달려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21]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애론 스와르츠의 가족은 그가 자살한 것이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이런 선고를 내린 것이 단지 본보기를 세우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22]

그에게 이런 과한 처사를 내린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정당하지 않은 선고였다고 얘기했다. 더군다나 그가 다운받은 480만 개의 논문은 전혀 다른 이들에게 노출되지 않았다.[23] 실제로 그가 다른 이에게 공유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약 사백만 개의 문서를 다운했을 뿐이었다. 만약 그가 한 번에 다운로드 한 것이 아닌 연속적으로 하나씩 봤다면 과연 그에게 누가 어떤 법을 내렸을지 궁금하다. 더욱이 이 사건으로 피해 본 이는 제이스토도 MIT도 아무도 없었다. 또한, 각종 소송 정보와 문서를 다루는 페이서(Pacer) 사이트의 문서 약 2천만 페이지의 분량을 다운받아 공개한 전례가 있었지만 이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24] 이러한 점을 봤을 때 공개하지도 않은 그가 다운로드한 480만 개의 문서가 이러한 과중한 처벌을 받을 만큼의 문제인지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컸다. 그의 가족과 애론 스와로츠의 파트너는 그가 정부와 침묵을 지키고 있던 MIT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이야기한다.[25] 그리고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한 편으로는 그를 기리며 자신의 논문에 해시태그를 걸어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고 하버드는 그가 죽기 전인 2008년부터 자신의 학교에서 나오는 학술논문과 연구자료를 온라인에 올리고 일반인에게 공개했다.[26] 또한,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몇몇 어나니머스 해커들은 MIT 사이트를 해킹[27]하기도 하고 몇몇 과학저널에서는 PDF 형식으로 자료를 볼 수 있도록 다운로드는 안되지만, 논문의 PDF 버전을 공유하는 등의 변화가 생겨났다. 그를 기리기 위한 웹사이트는 물론 미국 도서관 협회의 제임스 매디슨 상(James Madison Award)[28], EFF Pioneer Award[29], 명예의 인터넷 홀(Internet Hall of Fame)[30]와 같은 상이 그에게 주어졌다. 최근에는 자신이 논문을 쓰면 arXiv에 우선 공개하는 문화도 생겨나고 있다. arXiv 웹 사이트에 논문을 올려두면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무료로 열람도 가능하다. 이러한 문화야 말로 정보의 자유화가 갈수록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이 보여지는 전적인 사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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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1일, 그는 떠났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빈자리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월드 와이드 웹(WWW)의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는 애론 스와르츠의 죽음을 애도하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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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소는 잘못된 것이며 그가 무죄를 선고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의 멘토이자 현명했던 한 사람을 잃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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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지금의 변화가 그가 자살하여서 만들어낸 변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씁쓸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이런 씁쓸한 죽음에 대해서 무엇 때문인지 모를 정부의 과한 처사와 제이스토, MIT의 침묵, 그리고 사람들의 무관심이 ‘비운의 천재’ 수식어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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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경 yuopboy@grayhash.com